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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뜨억

[신만이 아는 세계] 치히로 진히로인설에 대하여

 

근거 1. 행동패턴이 제한된 다른 히로인들과는 다르게 자유롭다.

 

신만이 아는 세계의 히로인들 대부분이 미연시 히로인들의 속성을 따른다. 덕분에 미연시 폐인인 케이마는 자신이 플레이했던 게임을 바탕으로 히로인들의 행동패턴을 예측, 분석해서 함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히로인이 미연시를 기반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케이마는 사실상 공략이 불가능해진다는 뜻. 그리고 처음으로 미연시 속성은 전부 배제하고 '완전한 리얼(현실)의 여자' 컨셉으로 등장한 히로인이 바로 코사카 치히로.

 

 

엘시의 도주혼 센서가 울리기 시작하면 그 히로인을 공략 상대로 인식하고 분석 후 자신이 플레이 했던 미연시를 기반으로 루트를 이끌어나가 엔딩을 보는 것이 케이마의 주된 공략 방법이다. 하지만 치히로는 처음부터 달랐다. 4권이 주로 치히로 공략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치히로가 첫등장한 때는 1권. 있는 듯 없는 듯 처음부터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않았지만, 4권에서 치히로에게 도주혼 센서가 울렸을 때 케이마는 강력하게 공략 거부 의사를 드러냈을 정도로 그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솔직히 치히로는 단순히 케이마에게 공략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애초에 비상한 머리와 자신이 플레이한 미연시가 유일한 무기인 케이마는 미연시 히로인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치히로를 공략하고 싶어도 공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케이마는 처음부터 공략을 포기하고 '치히로를 다른 남자와 이어주자' 라는 생각으로 행동한다. 덕분에 치히로 에피소드는 다른 히로인들의 에피소드와는 다르게 매우 특이한 전개인데, 케이마의 공략 위주로 진행된다기 보다는 우연과 우연이 맞아떨어져서 얼떨결에 치히로가 케이마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케이마는 치히로에게 도주혼 구류를 목적으로 접근했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이레귤러적 요소가 넘쳐나는 히로인인 치히로는 첫번째 공략 때와 마찬가지로 여신 에피소드에서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행동을 자주 한다. 예를 들어 병문안 이벤트 때는 치히로가 오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찾아오질 않나, 첫번째 공략 때도, 두번째 공략 때도 케이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해버리질 않나, 뜬금없이 고백을 하질 않나, 아유미에게 '케이마는 거짓말쟁이야!' 라는 케이마도, 독자도, 며느리도 깜짝 놀랄 말을 하기도 한다(아유미를 위해서였지만). 이 말도 안되는 상황들은 치히로가 미연시 히로인 설정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기반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치히로는 무슨 짓을 해도 캐릭터 본래의 설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치히로는 케이마의 공략이 사실상 불가능한 히로인. 신만이 아는 세계 히로인 설정 자체를 뒤흔든, 그리고 뒤흔듬이 가능한 유일무이의 히로인이다.

 

 

 

 

근거 2. 케이마에게 현실의 혹독함을 알려준 히로인

 

케이마는 치히로로 인해서 공략 전에도, 공략 도중에도, 공략 후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애초에 공략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니 계속 공략이라 칭함.) 케이마는 치히로 공략에 들어가기 앞서서 히로인의 관찰을 끝마쳤음에도 불구, 루트가 전혀 보이질 않아서 줄곧 당황하고, 결국 '미연시 히로인을 공략한다!'라는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치히로에게 접근한다. 공략 도중에도 치히로의 행동을 예측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긴 마찬가지. 그리고 어찌저찌 치히로를 함락시키고 나서도 여태껏 보여준 적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빠진다. 이 장면에선 케이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딱히 표현을 해놓지 않았는데 이건 후반부의 좋은 복선이 될지도...

 

 

 

 

2D, 미연시, 게임을 상징하는 케이마는 3D, 리얼(현실)을 상징하는 치히로와는 오히려 적에 가깝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캐릭터가 왠지 모르게 성격은 매우 비슷하다는 것. 어쩌면 케이마는 치히로를 보면서 '리얼(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느꼈을지도...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한데, 치히로는 현실에서 등돌리고 게임의 이상만을 따르던 케이마를 현실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치히로 공략은 케이마에게 있어서는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고 보다 확실히 인식함과 동시에 현실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되는 원인이 된다. 빠른 여신 공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치히로를 냉정하게 차버려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고, 케이마 자신도 현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한동안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버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함이 원인이 된 최대이자, 최악의 실패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케이마를 초반부의 '현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라는 마인드를 가진 케이마와 비교해보면 정말 믿기 힘들 정도의 성장이다.

 

 

 

 

근거 3.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인 것이 어째서 근거가 되느냐 하면 평범한 소녀라도 사랑에 빠지면 일단 존나 이뻐..

 

 

 

 

는 농담이고 아무런 설정도 없이 평범한 것이 오히려 치히로에게는 최강의 무기가 된다(정작 치히로는 자신이 여신이 없음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아유미, 시오리, 츠키요, 카논, 유이, 텐리는 '여신'이라는 무기가 있긴 하지만 이건 '누가 진히로인이 될 것이냐' 라는 대결에선 오히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알기 쉽게 말해서 아유미, 시오리, 츠키요, 카논, 유이, 텐리는 여신을 품고 있긴 하지만 이것은 언제 공략 때의 기억이 사라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 반면에 치히로는 여신 에피소드가 끝난 이후에 기억이 지워졌다는 묘사가 전혀 없었으니 앞으로도 기억이 지워질 일은 영원히 없는 셈. 즉, 케이마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선 공략 전부터 케이마를 짝사랑 하고 있던 텐리가 유일한 변수이긴 하지만, 치히로도 마찬가지로 공략 전(봄)부터 케이마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 상관은 없다. 그런데 첫번째 공략 전(봄)부터 좋아했다는 치히로의 말은 그 당시 이상할 정도로 애매하게 넘어가버렸다. 아직까지 사실여부도 불분명하고 자세히 다루지 않았는데 이것은 역시 후반부에 자세히 다룰 복선이라 생각된다.

 

 

 

 

근거 4. 리얼(현실)에 충실해지라는 작가의 간접적 메시지

 

이게 중요하다. 위 3개의 근거는 치히로가 진히로인이라는 의견보다는 다른 히로인과의 차별성을 주로 말한 느낌인데, 이 4번째 근거로 인해 '치히로가 진히로인이다' 로 전부 치환이 가능해진다.

 

신만이 아는 세계의 작가 '와카키 타미키'는 작가로서의 삶을 그다지 순탄하게 보내지 않았다(오히려 최악의 삶에 가까웠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해하기 쉽도록 8권의 띠지에 실려 있던 작가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살펴보자.

 

 

 

 21세

 소학관 신인코믹대상 입선

 22세 

 좌절

 23세 

 무직 

 24세 

 게임 

 25세 

 게임 

 26세 

 히키코모리(방구석 폐인)가 되다 

 27세 

 재기를 위해 도쿄 상경 

 28세 

 좌절 

 29세

 게임으로 스스로를 속이다 

 30세 

 속이는것도 한계 

 31세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다 

 32세 

 세계의 멸망을 바라다 

 33세 

 알바트로스 연재 개시 

 34세 

 알바트로스 연재 조기 중단 

 35세 

 저금 잔액 1만엔 

 35세 

 신만이 아는 세계 연재 개시 

 37세 

 소학관 만화상 낙선 

 애니메이션화 결정

 

대충 이런 느낌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만이 아는 세계의 주인공 '카츠라기 케이마'는 사실상 작가인 '와카키 타미키'의 분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게임 폐인 시절을 극복하고 현실에 뛰어들어 성공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듯이 케이마도 언젠가 현실에 뛰어들 것이다. 신만이 아는 세계는 케이마가 치히로에 의해 현실을 마주하고, 현실에 의해 상처받고,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작가의 감정 이입이 듬뿍 담긴 성장물이었던 것이다. 독자들에게는 '너희들도 나처럼 2D에 목매이지 말고 리얼(현실)에 뛰어들어라' 라는 간접적인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누구와 이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일까? 이 쯤되면 엔딩이 보이지 않는가? 즉, 카츠라기 케이마(와카키 타미키)는 자신의 이상(게임)을 졸업한 후 코사카 치히로(현실을 상징, 대표)를 진심으로 마주하게 되고 결국 이어질 것이다.